이상복 교수 (1934-2026)

Professor Sang-Bok Lee (193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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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Korean Neurol Assoc. 2026;44(3):254-256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August 1, 2026
doi : http://dx.doi.org/10.17340/jkna.2026.0045
Department of Neurology,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Seoul, Korea
성정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과학교실

조용한 일요일 오전 이상복 교수님이 자택에서 타계하셨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은 저를 잠시 동안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던 순간, 언제나 소탈한 웃음과 인자한 모습을 보이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우리나라 신경과의 큰어른으로 얼마 전에도 맥주를 드시던 건강한 모습을 뵈었기에 당혹감이 앞섰습니다. 한편으로는 연세가 많으셔서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는 체념과 지병 없이 주무시듯 편안히 돌아가셔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교차하며 만감이 들었습니다.

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상복 교수님에 대한 첫 기억은 신경과 전공의를 하겠다고 교수님 방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입니다. 반갑게 맞아 주시며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 주시던 말씀이 선합니다. 이후 1년 차 주치의로, 교수님의 외래 진료 보조로 들어가 경험한 시간은 그전까지 제가 환자와 의사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학문적 지식을 넘어 실질적인 의학의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한 번에 1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하셨으며 병이 없다는 말 한마디를 듣고자 서울대학교병원까지 찾아온 이들을 단 한마디로 안심시키고 증상을 호전시키셨습니다. 그 모습은 진료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지식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위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진료실에서 뵈었을 때는 대학에서 배운 교과서적 지식을 넘어서는 방식에 당혹감과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으나 저 또한 의사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깊이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많은 후배들은 이 과정을 얼마나 빨리 이해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진료가 수월해지고 환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가 좌우된다는 것을 아직은 잘 모를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시절부터 저의 수련 기간과 교수 생활 동안 교수님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언제나 교수님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했던 제자로서 이렇게 추모기를 쓰게 되어 매우 영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상복 교수님의 발자취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학문적 여정과 성취

이상복(李尙馥) 교수님은 1934년 4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59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셨으며, 이에 앞서 1958년 원자력원 해외 파견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도독(渡獨)하신 후 1972년까지 독일에서 수학하셨습니다. 처음 독일에 가셨던 1958년에는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라이에프스키 교수를 사사하여 Biophysics를 공부하셨습니다. 그 당시 초록 및 논문의 원본은 찾을 수 없지만 제목인 Über die Strachlenempfindlichkeit von Enzyme in der Zelle 등을 보면 엑스선(방사선)을 암세포에 쬐었을 때 세포의 생존과 증식에 필수적인 효소들이 어떻게 파괴(불활성화)되어 암세포가 죽게 되는지를 생물물리학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현대 방사선 암 치료의 시초가 되는 연구로 생각되며, 특히 특정 효소가 억제되는 것을 연구한 것은 표적항암제의 단초를 마련하는 연구이지 않을까 합니다[1-3].

이후 196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셨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뷔르츠부르크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병동장으로 근무하시며 독일 신경과 및 정신과 양 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셨습니다. 이어 1970년부터 1972년까지는 독일 마인츠 대학병원 신경과 병동장 및 Oberarzt (임상과장)로 근무하셨습니다.

1950년대 후반의 우리나라 상황을 돌이켜보면 원자력은 국가의 미래 전략 산업이었고 교수님은 극소수의 미래 과학기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하여 선발한 엘리트 프로그램에 뽑히신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12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고난의 기간이었을지 감히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에도 쉽게 꿈꾸기 힘든 외국 유학 중의 박사 학위 취득, 그것도 당시 세계 의과학을 선도하던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현지 대학병원의 과장직까지 역임하신 것은 고인의 치열한 노력뿐만 아니라 학문적 역량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셨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귀국 후인 1974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다시 한번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한국 신경과학의 기틀을 닦다

1972년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신경과가 신설되면서 조교수로 근무를 시작하셨고 1999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재직하시며 한국 신경과학의 기틀을 단단히 다지셨습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는 신경과 과장 및 내과의 신경내과 분과장을 역임하시며 우리나라 신경과가 신설과로서 자리 잡아가던 격동과 굴곡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 내셨습니다. 이후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과학교실 주임교수 및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과장을 역임하시면서 100명이 넘는 후학을 양성하여 신경과 발전의 거대한 토대를 만드셨습니다.

국내 학계에서는 1982년 대한신경과학회가 창립된 이듬해인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대한신경과학회 회장을 역임하셨고,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신경과학회 이사장,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다시 회장을 맡으시며 학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끄셨습니다.

교수님의 활동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으시고 세계신경과협회(World Federation of Neurology, WFN) 치매연구 집행위원, 미국신경과학회(American Neurological Association, ANA) 통신회원, 세계뇌졸중학회 국제자문위원을 역임하셨으며 독일 뇌파학회 및 임상신경생리학회 통신회원으로도 오랫동안 활동하셨습니다. 이러한 세계적, 국가적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 회원 및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원로 회원으로 추대되셨습니다. 1999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신 이후에도 학문적 열정을 놓지 않으시고 2003년부터 관동대학교 의과대학 석좌교수로서 후학 양성에 끝까지 힘쓰셨습니다.

학문 밖에서도 교수님의 헌신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수당 이남규선생기념사업회 회장, 한산이씨 대종회 이사장, 월남 이상 재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특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랜 기간 수학하시며 독일어에 능통하셨던 교수님은 프랑크푸르트가 낳은 세계적 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이에 “괴테를 사랑하는 모임”의 회장을 맡으시며 역사적 인물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는 문화 사업에도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후학 사랑

교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분이셨습니다. 맥주 한 잔을 기울이실 때면 오랜 세월 병원 생활을 함께해 온 노재규 교수님, 윤병우 교수님, 나덕열 교수님과의 추억을 소년처럼 즐겁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또한 매년 설날 아침이면 교실원들과 제자들을 모두 자택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자들과 함께 떡국을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내셨던 일들을 늘 그리움 가득한 어조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신경과학 분야에서 훌륭한 후학을 가르치고 동료 및 제자들과 따뜻한 애정을 나누는 것이 교수님 생애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배우자는 피아니스트이자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하신 장혜원 명예교수님입니다. 슬하에는 유일한 자녀이자 백석예술대학교 디자인학부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는 이호원 교수가 있으며 사위인 서울대학교병원 이비인후과 서명환 교수 역시 고인의 고결한 뜻을 이어받아 의료와 학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영원한 스승을 보내며

이상복 교수님께서는 한국 신경과학의 여명기부터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 뿌리신 씨앗은 오늘날 대한신경과학회라는 탄탄한 학문적 토대로 자라났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은 그 뜻을 이어받아 현재 신경과학의 각 분야 교육, 연구, 진료에서 명실상부한 국내외의 거목들로 성장했습니다. 그 모든 발전의 밑거름에는 먼 이국땅에서 묵묵히 서양의학을 배우고 귀국하신 후 학자로서의 본분만을 다하며 조용히 제자들을 길러 내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뇌사 판단 기준이 없었을 때 이를 촉구하는 이상복 교수님의 저술 중 「죽음이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논하는 철학적 논의의 시작으로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 (공자)’라고 한 어느 고인의 말과 같이 삶과 죽음은 철학의 중심과제로서 아직도 많은 의문점… (중략). 죽음판정기준으로서 종래 확고부동의 위치를 견지하던 심폐기능설이 몹시 흔들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뇌사설로 선뜻 대치되지 않는 것은, 뇌사판단이 쉽지 않아서 전문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까닭… (중략). 의학적판단은, 그 어떤 가치기준에도 의존하지 않는 몰가치적인 사실판단이다(중략). 그러므로 뇌사는 전체 뇌의 기능상실로서만이 뇌사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중략). 앞으로 이 기준을 근거로 뇌사를 죽음으로 간주하는 법문화가 하루속히 이루워지기를 바란다.” 이 글을 통해 현대의학이 단시간에 엄청난 발전을 일으켰고, 한 의학자의 삶 속에서도 그 변화를 먼저 체감하고 노력하신 모습이 읽혀집니다. 짧은 생이 인간의 숙명이지만 앞선 세대의 꿈을 이어받아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것이 인류의 발전일 것입니다. 이상복 교수님은 가족과 제자들을 통해 발전하는 신경학 속에 생생히 살아 있음을 확신합니다. 늦게나마 단장(斷腸)의 슬픔을 품고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오니 부디 영면(永眠)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References

1. Lee S. Über die Strahlenempfindlichkeit von Enzymen in der Zelle Dissertation Frankfurt: Johann-Wolfgang-Goethe-Universität; 1964.
2. Lee S, Rajewsky B, Pauly H. Röntgenstrahleninaktivierung von Enzymen in der Tumorzelle Tagungsbericht. Göttingen: Gemeinsame Tagung der Deutschen Gesellschaft für Biophysik EV; Wien: der Österreichischen Gesellschaft für reine und Angewandte Biophysik. Bern: der Schweizerischen Gesellschaft für Strahlenbiologie 1964;:193–195.
3. Lee SB. Über das Diffusionsmodell bei der indirekten Strahlenwirkung. In: EDITOR. A collection of scientific papers in commemoration of the 60th birthday of Prof CW Myung. CITY: PUBLISHER, 196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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